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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같은 내장산 아래

    그림같은
    내장산마을

    붉은 단풍과 어우러진
    그림같은그곳
    창암 이삼만은 1830년 정읍현 동명 부무곡에서 태어났다. 호는 창암이다.

    이삼만은 뱀만 보면 잡았다. 닥치는 대로 잡아서 생식도 하고 구워서도 먹었다. 독사가 눈에만 띄었다 하면 그 자리에서 잡아 살과 뼈까지 씹어 먹곤 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어떤 날은 일부러 산에 올라 뱀을 잡고 또 먹는데 하루해를 보내곤 했다. 이렇게 몇 년을 눈에 보이는 대로 수백 마리의 뱀을 잡아먹으니 그 다음부터 뱀이 이삼만을 보면 기가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잡히곤 했다 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삼만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 아버지가 약초를 캐서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약초를 깨다가 그만 그의 아버지는 독사에게 물려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이삼만은 아버지의 그리움이 절절하였다. 사랑 하나로 이끌어 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다가 밤을 밝히곤 했다.
    그는 굳은 마음을 더 다졌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결의에 찬 다짐이었다.

    그 뒤부터 이삼만은 뱀을 잡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를 죽인 뱀은 철저히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뱀을 잡아 생으로 먹기도 하고 구워서 먹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산에 가서 뱀을 잡아죽이고 실컷 먹고 돌아왔다. 몇 년 간을 이렇게 뱀을 죽인 뒤에는 뱀들이 이삼만을 보면 주눅이 들어 옴짝도 못했다. 또 수년을 이렇게 뱀을 잡아먹은 결과 그는 힘이 세고 튼튼한 몸을 지닐 수 있었으며 특히 정력이 말년에까지 좋았다 한다.
    이 전설이 전하여져 호남 지방에서는 정월의 첫 사일에는 맴방아를 종이에 써 붙이는데 '이삼만'이란 이름 석자를 써 붙였다. 이삼만의 이름자만 봐도 뱀은 접근을 못했다.

    그는 뱀을 잡는 명수였지만 글씨를 잘 쓰는 명필이기도 했다. 한번은 정읍의 어느 한약방에 들러 놀고 있는데 약방주인이 대구약령으로 가는 약명을 좀 써 달라고 했다. 한가한 틈이라서 이삼만은 약방주인이 부르는 대로 약의 이름을 많이 써 주었다. 이 약명 즉 물목기는 대구에 도착하여 중국의 약장사 즉 화상의 손에 들어갔다. 화상이 물목기의 글씨를 보니까 특이 했다. 참으로 잘 쓴 글씨였다. 화상은 감탄하여 대구의 거래 약방에서 이 물목기의 글씨가 누구의 글씨냐고 물어오자 이삼만의 글씨임을 알려 주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서 화상 하나가 이삼만을 찾아왔다. 얼굴에 맑은 정기가 감도는 화상이었다. 찾아온 내력을 물으니 이삼만 선생한테 글씨를 받으러 왔다 하며 공손히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삼만은 사양하지 않고 반가히 대접했다. 글씨를 중국 사람이 받으로 왔다는 것은 그에겐 영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삼만은 붓을 들어 석상휘호, 일필휘지했다. 화상은 이 명필의 글씨를 받아들고 사례했으며 즉시 돌아갔다. 이런 소문이 주위에 많이 퍼지자 이삼만은 글씨가 명필이라는 소문이 퍼져갔다. 그 뒤 그는 문자 그대로 명필의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

    한가지 흥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여름날이었다. 창암이 전주 함벽당에 이르렀을 때 어떤 부채장수가 낮잠을 곤히 자고 있었다. 창암은 얼른 부채 몇 개를 집어다가 달필의 글씨를 써 놓았다. 잠에서 깬 부채장수가 깨어보니 부채에 멋들어진 글씨가 쓰여 있었다. 창암은 그 때야 자기가 이삼만이라고 밝히고 웃었다. 부채장수가 부채를 들고 남문 쪽으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명필 이삼만의 글씨라 하여 부채가 그 자리에서 다 팔려 버렸다 한다.

    당시 명필이요 병조판서였던 추사 김정희가 현종 6년 윤상도 사건에 연유되어 제주도에 귀양가는 길에 창암을 만났다. 창암보다 16살이나 아래였으나 그 당시 명필로 너무도 유명하였던지라 추사를 보려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추사가 예를 갖춰 창암을 대하고 글씨에 감탄하자 그 뒤부터 이삼만의 글씨는 더욱 빛이 났다.

    삼만이란 이름은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기에 늦었고 벗을 사귀는 것이 늦었고,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으니 이 세가지가 늦었다는 데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삼만이라고 불렀다 한다. 결국 불리워졌던 별명이 오늘의 이삼만인것이다.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의 고향인 전주로 이사하여 옥류동에 터를 잡고 글씨를 쓰며 말년을 지냈다 한다. 옥류동의 바위에 새겨진 연비어약은 그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창암이 52세 때 부인 김해 김씨는 딸 둘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떳다.

    그 후 이삼만은 한동안 혼자 글씨에만 전념하다가 옛부터 자주 만나던 명창 심녀와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심녀 역시 창암의 회갑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창암은 이에 더욱 슬픈 마을을 진정한 길이 없어 글씨에만 정성를 쏟았는데 매일 1천자씩을 쓰고서야 붓을 놓았다고 한다. 창암은 1895년 2월 12일에 세상을 떴으니 그의 나이 78세였다.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그의 묘소에는 부인 김씨와 명창 심녀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